해남 두륜산 (頭輪山)
두륜산은 가련봉, 두륜봉, 고계봉, 노승봉(능허대),
도솔봉, 혈망봉, 향로봉, 연화봉의 8개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이 중 가장 높은 봉은 가련봉으로서 높이 703m.
정상에 오르면 서해안과 남해안의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오며,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한라산까지 보인다.
두륜의 뜻은
산 모양이 날카로운 산정을 이루지 못하고
둥글넓적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또한 대둔사지에 의하면,
두륜산은 중국 곤륜산의 ‘륜’과 백두산의 ‘두’자를 딴 이름이라고도 한다
2018. 11. 10
"고계봉" 을 배경으로 ....
사찰 뒤 두륜산 형세가 누워 있는 부처님 모양이다.
오른쪽 두륜봉은 부처님의 머리 형상이고,
가련봉과 고계봉은 살짝 주먹 쥔 한 손에 다른 손 검지를 넣은 지권인(智拳印)을 똑 닮았다
두륜산은 산세도 좋지만 대흥사 숲길로도 이름 높다.
대흥사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숲터널이다.
예로부터 ‘십리숲길’로 이름난 곳으로
아홉 굽이 숲길이라 하여 ‘구림구곡九林九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흥사 숲은 치밀하고 찬란하다.
"가련봉" 에서 내려고 잇다 ...
"오소재 약수터"
오소(烏巢)재는 주작산과 덕룡산을 잇는 재
까마귀 둥지가 많다는 이름처럼 까마귀가 제법 소란을 떤다.
"오심재"
용화전(龍華殿)
이는 오랜 세월동안 노출돼 있던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해 최근에 세운 것이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
높이 4m.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일반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이지만,
각 부분의 양식은 매우 간략화되었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바위에 부조돼 있는 국보 제308호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성은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도 유려해 한국의 마애불상 중에서
매우 뛰어난 석불로 평가받고 있다.
네 귀퉁이에 있는 천인상 역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천년나무'
대흥사가 처음 시작된 곳이라는 만일암터에
하늘에서 쫓겨난 천동과 천녀가 불상을 조각하는 동안
해를 매달아 놓았다는 설화를 간직한 천년수가 있다.
수령 1천 년이 넘은 이 느티나무는
올해 초 역사 속에 '전라도'라는 이름이
등장한 지 1천 년이 된 해를 기념하는 '천년나무'로 지정됐다
두륜산의 주봉(정상)은 가련봉이지만
산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이름만 ‘가련’할 뿐 봉우리는 표독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여기는 두륜산 능선의 암릉을 보는 맛은 그만이다.
노승의 머리처럼 생겼다는 노승봉은 옆에 있다
두륜산의 주봉(정상)은 가련봉이지만
두륜산이란 이름은
만일재를 사이에 두고 정상 남쪽에 솟아있는 두륜봉에서 나왔다.
두륜은 산꼭대기가 둥글다는 뜻이다
"만일재"
두륜봉과 가련봉 사이의 만일재는 북일면과 대흥사를 잇는 고개.
가을철 은빛으로 채색된 억새 물결은
두륜산의 1경으로 친다.
안일재는 고봉에 흔치않은 평원인데다
햇볕이 따뜻해 동절기 산꾼들의 식사 장소로 최적이다
지금은 탈색된 억새만이 바람을 쓸고 있을 뿐...
만일재의 억새가 가을 바람에
살랑 살랑 꼬리를 흔들며 가지 말라고 붙잡는다...
대흥사 로 하산 ....
자연 암반 위에 세워진 석탑 옆
널따란 바위 위에 식사를 맛잇게 먹고 있다
대흥사로 하산 ....
이끼 낀 바위를 타고 내려와 단풍길 을 따라 "일지암" 으로 ...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조선후기 대표적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나라의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초의선사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인 일지암이 나온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유명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다산정약용, 추사김정희와 같은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쇠퇴해 가는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했던 곳으로,
일지암은 한국차의 성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일지암 (一枝庵)
조선의 차(茶)문화를 일으키고
정립한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가 40여 년간 머문 곳이다.
초의선사는 39세 때인 1824년에 일지암을 중건하고
81세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며 수행했다
이곳에는 옛 정취가 그래도 살아 숨 쉬는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선다를 음미했던 다정(茶亭)이 있으며,
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나무대롱에 연결된 돌물확(수조)에 담겨져 흐른다.
이 다천(茶泉)과 돌물확, 차를 끓이던 다조(돌부엌),
위아래의 연못과 좌선석(坐禪石) 등은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정자는 가운데 방 한 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뒀다
‘일지암’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는
1980년한국다인회 회원들이 다도의 중흥조 초의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일지암 에서 대흥사로 ....
조용한 동국선원을 찾는 관람객이 많아진 이유는 따로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선원은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지만,
문 대통령 당선 이후 문의가 쇄도하면서 안거 기간을 제외하고 개방 중이다.
문 대통령이 묵었던 요사채 7번 방 앞에는 아예 안내문이 붙었다.
문 대통령은 대흥사에서 공부하던 시절
차를 배운 이후 차를 즐긴다고 밝힌 바 있다
"대광명전' 은 초의선사가
유배 중이던 추사의 방면과 축수를 위해 지은 전각이다.
동국선원의 편액은 추사의 글씨다
대웅보전이 사찰의 한가운데가 아닌
북쪽에 물러서 있는 것도,
사찰 규모와 비교하면 대웅보전 마당이 작은 것도 여느 사찰과는 다른 점이다.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조선 후기 쌍벽을 이루는 두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다.
'대웅보전'이 이광사의 글씨, 왼편 요사채인 백설당에 걸린 '무량수각'(无量壽閣)이 추사의 글씨다.
두 명필의 글씨가 나란히 걸리게 된 일화도 유명하다
"대흥사 연리근'
두 나무의 가지가 붙으면 연리지이고, 줄기가 붙으면 연리목인데,
이것은 뿌리가 붙었다고 해서 연리근(連理根)으로 불린다.
연리(連理)는 '비익연리(比翼連理)'의 준말로,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을 담은 시
'장한가'에서 유래했다.
'하늘에는 비익조, 땅에는 연리지'라는 뜻으로
두 사람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란 시다.
비익조는 눈과 날개가 하나밖에 없어
암수가 함께 있어야 날 수 있는 전설의 새다
일찍이 이 터의 가치를 알아본 서산대사는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라고 했다.
묘향산에서 입적하며 의발(衣鉢, 가사와 공양 그릇)은
해남 대흥사에 두라고 한 이유다
.
대흥사는 20개 시군에 말사 50여곳을 거느린 종찰인데
승탑이 많은 절로도 유명하다.
절의 초입에 수십개의 탑들이 울타리 안에 늘어서 있는데
이 부도탑들은 사리를 모시는 탑이라고 해서 사리탑이라고도 불린다.
50여 기에 이르는 부도가 모여 있는 부도림이 삼나무 숲길 끝과 사찰 입구 사이에 있다.
서산대사(1520∼1604)와 연담유일(1720∼1799), 초의선사(1786∼1866) 등
조선을 대표하는 스님들의 부도가 가득하다
이 탑들을 살펴보면
통일신라 시대 탑의 양식이
고려와 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찰을 지키는 사천왕문이 없는 이유
북쪽의 월출산, 남쪽의 달마산, 동쪽의 천관산,
서쪽의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는
풍수명당이기 때문이라 한다.
.
"유선관"
한옥여관 유선관으로 이름을 바꾼 유선여관은
지난 1923년에 지어졌다.
유선관이 애초에 여관용도로 쓰였던 것은 아니지만
대흥사를 찾는 객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여관으로 용도가 발전한 것이다
1960년대 광주유곽 출신의 한 기생이 사들여
유선여관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주인이 바뀌면서 유선관으로 개명했는데
세간에 알려진 것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소개되면서부터”라고 말했다
이후 "유선관" 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 ‘서편제’ ‘천년학’ 등이 촬영됐고
천년학 촬영 중에는 칠순을 맞은 임 감독이
이곳에서 생일상을 받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유선관은 이제 숙박업소로 영업하면서
판소리공연 등 예술공연을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녹우당(綠雨堂)
녹우당이라는 이름은 덕음산에 울울창창(鬱鬱蒼蒼) 자리 잡은
비자나무숲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비자나무 잎들이 바람에 쓸리면 마치 비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녹우당은 일반에게는 고산 윤선도 고택으로 알려져있으나,
500여년 전 입향하여 본관을 얻은 어초은 윤효정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 5대 윤선도(1587-1671), 8대 윤두서(1688-1715) 등
조선시대 인물들을 배출한 학문적, 경제적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녹우당은 전남지역에 남아있는 고택(古宅)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로 이뤄졌다.
한편으로는 사랑채 이름이기도 하다.
효종 임금이 사부였던 고산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지어준 집의 일부를 뜯어 1668년에 배로 옮겨온 것이 녹우당이다.
"해남성당'
1954년 4월 1일 설립된 성당으로
초대 신부는 김병준 요한 신부이다.
해남 지역에 천주교가 자리잡게 된 것은
1950년 목포 산정동 본당의 쿠삭 신부에 의해서이며
1951년 7월 목포 경동 본당의 김성환 신부의 노력으로 해남 공소가 발족되었다.
1954년 1월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959년 4월에는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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